끼아라 루빅(1920-2008)

180여 개국에

전파된 포콜라레운동 창설자로서

일치의 영성을 태어나게 하였다.

©CSC Audiovisivi – Archivio

끼아라 루빅Chiara Lubich

현시대의 위대한 카리스마적 인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생전에 여러 종파의 개신교 신자들, 다른 종교인들, 종교가 없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형제애 그리고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포콜라레 일치의 정신이 시민 생활, 종교, 정치 및 경제 분야에 스며들도록 노력한 공로로 종교계의 노벨상인 ‘템플턴상’  ‘유네스코평화교육상’을 비롯한 여러 주요 부문의 상을 수상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신학, 철학, 심리학, 경제, 사회 과학 등 15개 분야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부터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1997년 5 18일에는 역사상 최초로 백인이자 여성이며 가톨릭 신자로서 뉴욕 할렘의 말콤 엑스 이슬람 사원에서 3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연설하였다. 이처럼 끼아라 루빅은 교황과 여러 교파의 개신교 수장들 및 다른 종교계 요인들, 그리고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맺은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일치의 영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2008년 3 14일 선종하였고, 2015 1 27일 교구 차원에서 시복 시성 절차가 시작되어 2019 11 10일 종료되었다. 현재 교황청 시복시성성에서 검토 중이며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끼아라 루빅 약력

1920

1월 22일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출생하여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1944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폭격으로 가족은 피난을 가지만 끼아라는 트렌토에 남는다. 동료들과 함께 카푸치니가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포콜라레 공동체’를 이룬다.

1949

1949년부터 1959년까지, 해마다 여름에 동료들과 함께 트렌토의 돌로미티 산으로 가게 되는데, 점차 함께하는 사람의 수효가 불어난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인 ‘마리아폴리Mariapoli’ 모임이 시작된다.

1961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포콜라레의 복음적 영성을 알고자 하는 몇몇 루터교 목사를 만난다. 이로써 여러 교파의 그리스도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가 시작된다.

1962

성 요한 23세 교황 ‘마리아사업회’라는 이름으로 포콜라레운동을 인준한다.

1977

런던 길드홀에서 수많은 종교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종교계 노벨상인 ‘템플턴상’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공식적으로 종교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1984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로마 근교 로카디파파에 위치한 포콜라레운동 국제 본부를 공식 방문한다.

1984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로부터 개정된 포콜라레운동의 회칙인준받는다.

1991

브라질 상파울루 근교에 있는 포콜라레운동의 소도시마리아폴리 아라첼리에서 ‘모두를 위한 경제, EoC’ 프로젝트창안하여 공표한다.

1996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네스코평화교육상’수상한다. 루블린 대학에서는 사회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전 세계 여러 명문 대학에서15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1997

미국 뉴욕의 할렘에 위치한 말콤 엑스 사원에서 미국 무슬림 소사이어티에 속한 아프로아메리칸 무슬림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증언한다.

1998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처음 열린 교회 운동들의 국제 모임에서 끼아라는 교회 운동들 사이의 친교와 일치를 위해 일할 것을 교황에게 약속한다.

2004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럽의 일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하루 모임을 개최하는 주축이 되는데, 유럽의 150개 교회 운동 및 공동체에 속한 9천여 명이 모인다. 이는 교회 운동들 사이에서 이룬 일치의 여정의 결실이다.

2007

12월 7일 교황청의 인준으로 ‘소피아대학원대학’이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에 위치한 로피아노에서 개교식을 갖는다.

2008

3월 14일 로마 근교 로카디파파의 자택에서 선종하였다.